네블리아의 웨딩 드레스

오랫동안 정들었던 마비노기를 떠나서 WOW를 시작하기로 결정했을 때,
아제로스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는 만레벨도 장비를 갖추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겪는 북미형 MMORPG였기도 했고 파티 플레이가 더 중요했지만
에린에서 패치 때문에 마음 상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포스팅 없이 즐기는 것.

이글루스 WOW 가든이나 인벤, 플레이포럼같은 웹진과 관련 팬사이트에서는
좋은 장비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던전에 가고, 이름있는 몹들을 잡으며
어느 던전을 클리어하고 뭘 킬했다는 내용이 주류였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 정도로 열심히 할 여유도 없을 뿐더러, 힘빼고 즐기는 것이 제일 좋으니까.

시작할 때 종족과 직업을 정하는 게임이지만 선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워크래프트는 2였고 인간과 오크가 서로 싸우는 이야기였어서
인간부터 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캐릭터 중에 제일 이쁘기도 했지만.
직업은 별로 끌리지 않거나 쉬고 싶은 것부터 차례로 지워서 마법사로 결정.

아제로스의 마법사는 천으로 된 장비만 쓸 수 있으니까 재봉술을 배웠고
접속시간이 불규칙해 혼자 할 때가 더 많을테니 응급치료를 배우기로 했다.
오랫만에 초보가 되었으니 아무 것도 없을 때부터 하나씩 만들 생각이었는데
잘 걷지도 못하는 걸 본 어느 고레벨 유저께서 가방을 선물하셔서 실패했다.


'내가 배울 것은 모두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제목을 가진 책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
슬슬 아제로스에서 지내는 시간이 쌓여도 '마비노기에서 다 배우고 온' 기분이 든다.
WOW는 확대하면 1인칭 시점이 되고, 캐릭터의 뒷모습만 보는 것이 기본 시점인데
내 캐릭터의 정면을 보고 싶어 해서 마우스를 좌클릭하고, 룩을 따지는 것도 그렇고.

아제로스의 장비들은 멋을 따지지 않는다. 하급부터 에픽까지 빈도와 성능에 따라
색깔별로 다 구분되어 있고, 더 좋은 아이템을 얻으면 이전까지 쓰던 것은 팔게 되며
이름이 있는 몹이 주는 좋은 아이템을 얻기 위해 던전에 여러 번 가는 건 일상이다.
성장할수록 더욱 무서운 던전에 가고 더 무서운 몹을 잡으며 무용담을 자랑하는 곳.

자신이 속한 진영과 종족이 분명하고, 나는 직업별 주특기를 가진 병사일 뿐이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한 걸음 떨어져서 보게 되니 항상 '게임을 한다'는 감각이 있고
아무리 평판이 높아져 스톰윈드의 확고한 동맹이 되어도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든다.
배경 설정이 무섭고 어두운 편인 것도 있어서, 밝은 이야기는 접하기 어렵기도 하고.

수많은 NPC가 있지만 심부름을 시키는 NPC, 도와달라더니 날 속인 거였던 NPC,
세상과 관계없는 자신의 일을 그저 의뢰하는 NPC들은 이미 에린에서도 다 보았다.
어떤 수식어를 붙이든 멀록은 멀록이고 트로그는 트로그이며 오우거는 오우거였고
지방색은 확실하지만 하나의 배경음악이 여러 곳에서 반복되는 것도 다를 게 없고.


지인의 고레벨 캐릭터의 도움을 빌려 빨리 키우는 걸 선호하는 분들도 많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초보 시절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비록 매우 고생이라도 맨바닥에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쪽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도와주는 지인은 양날의 검같은 것이라서 겪어볼 수 있는 고생을 줄여버리니까.

재봉술을 배우기로 한 다음 공식 홈페이지의 설명을 보니, 가방도 만들 수 있지만
턱시도나 웨딩 드레스같은 특별 의상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을 목표로 삼았다.
결혼 의상에는 은근한 마력이 있어서, 결혼할 상대가 없고 그럴 생각이 별로 없어도
한번쯤은 입은 모습을 보고 싶게 마련이다. 에린에선 상대가 없어 그럴 수 없었지만.

아제로스의 재단은 에린보다 쉽고 간단해서, 물레나 베틀이 없어도 재료만 있으면
어디서든 의상을 만들 수 있고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 재료 구입이 조금 고생인데
캐릭터 레벨이 오를수록 상대하는 인간형 몹들도 그에 비례해서 좋은 재료를 주므로
꾸준히 만들기만 하면 되고... 마비노기의 실패에 꽤 질려있던 참이라 즐겁게 했다.

공식 홈페이지에 실린 것은 턱시도를 입은 노움뿐이라 어떤 드레스인지 몰랐는데
재봉 숙련 250에 도달해서 만들고 보니 베일이나 면사포가 없는 깔끔한 드레스더라.
면사포가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숙련한 보람이 느껴지는 옷이었다.
레벨도 장비에도 관심이 없는데 저 드레스는 이상하게 만들고 싶었으니 신기하군.


여기도 증뎀(데미지 증가량), 치증(치유 증가량) 등등의 두 글자 약어는 여전하고
게다가 북미가 원산지라 애드(의도하지 않은 몹이 가세하는 것) 같은 영어도 있어서
사용하는 표현은 몇 배 더 어지러운 세계. 조심하는 편이라 아직 당한 적은 없지만,
게임 전체가 전쟁의 향기가 강해서 '유닛'으로서 서투르면 여지없이 욕을 먹는다.

아제로스에 있어도 늘 에린과 비교하게 된다는 것은 정말 알 수 없는 기분인데,
양쪽의 장단점을 보게 되어도 어느 쪽이 더 완벽하게 잘 만들었다는 느낌은 없다.
에린은 에린이고 아제로스는 아제로스, 게임은 전체적으로 보면 다 같구나 싶더라.
레벨이 깡패이고 좋은 장비가 필수인 여기 와서도 여전히 밀레시안처럼 살고 있다.

어떤 옷을 가지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그걸 만들어 줄 수 있고 기뻐하면 즐거우며,
처음 시작할 때 선물받은 옷을 만들 수 있게 되어서 그 장비에 캐릭터 이름이 뜨고,
플레이할 때마다 내게 필요없는 것은 우편으로 다른 분들께 보내드리는 것이 좋다.
그러다 보면 레벨은 오를 것이고 장비를 파밍하는 것에는 여전히 관심이 없으니까.

수많은 WOW 유저들과 좀 다르게, '살림을 장만하고 선물하는' 쪽이 훨씬 더 즐겁다.
게임은 마감이 없고 퀘스트는 과업의 일부지만 숙제가 아니란 것도 에린에서 배웠고
던전용 퀘스트를 받아뒀지만 길드 사람들과 같이 놀 때 해결되겠지 하고 지내고 있다.
이러다 보니 웹진의 너프 논쟁은 별나라 이야기. 조금은 힘을 빼고 즐기게 된 듯하다.


네블리아의 웨딩 드레스






* 스톰윈드의 은행 앞에서. 계단에 빛이 반사하는 효과 때문인지 상당히 밝게 나왔다.








* 스톰윈드 대성당 광장에서. 사실 성당 계단에서 찍고 싶었지만 건물의 그늘이 너무 커서 아쉬웠다.
by 세이트 | 2007/05/20 14:06 | 게임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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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시니키 at 2007/05/20 18:37
의외로 WOW 내에서는 생산 매니아가 제법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게임 잡지에서 WOW 기행을 읽었을 적에는...)
웨딩드레스 예쁘네요. ^^ 대성당 앞에서 찍으니, 네블리아 양이 유럽식 결혼을 기다리는 신부 같습니다.
Commented by 세이트 at 2007/05/21 12:40
시니키님//WOW의 생산은 제작 실패가 없고 만들어서 선물하는 즐거움도 있어서 꽤 맘에 들더군요. 처음 봤을 때는 기대와 달라서 좀 아쉬웠는데, 보면 볼수록 이쁜 드레스더라구요. 항상 모자와 로브만 입다가 저 드레스를 입었더니 캐릭터가 너무 달라보여서 놀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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